책 표지 초록 색상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과 안정감에 이 책이 아버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할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따뜻한 가족 사려니 생각하며 시작했는데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유물론이란 무거운 소재들이 걸쭉한 사투리와 블랙코미디처럼 풀어져 나와 신선한 충격과 함께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첫 장을 넘기면서 이미 나의 당황스러움과 충격을 작가는 즐기기라도 하듯이 술술 풀어낸다.

나는 2년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종종 떠올리곤 한다. 결혼 후 큰 사건도 없고 서울과 지방이라는 거리도 있었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오롯이 정들만한 추억은 손톱 만치도 없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럼에도 시어머니가 기억에 남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하는데 [아버지의 해방 일지]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내가 시어머니를 많이 좋아했었구나 생각을 했다.
주인공 아리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 또한 시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리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와 민중을 위한 신념이 투철하고 일관적인 이념의 소유 자시며 사람 노릇을 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리에게는 세상 헛되고 필요 없어 웃음만이 터지는 쓸데없는 고집으로 보였고 무능함으로 보였다. 나의 시어머니도 연륜에 빛나는 총기와 세월에 연마된 재치 있는 언변으로 당신의 생각을 사투리 하나 없이 구수하고 구성지게 전달하곤 하셨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웃음기 있는 얼굴로 보시지만 간접적 직접적으로 가르침은 곱게 뻗은 손가락처럼 정갈하고 단정한 느낌에 한마디셨다. 하지만 며느리가 바라본 시어머니는 마냥 어렵고 가까워질 수 없는 강 같은 존재였기에 아리처럼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사람처럼 생각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일 동안 장례를 치르며 아버지의 존재감을 알게 되었듯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도 시어머니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되짚는 계기가 되었었다. 시어머니가 자주 찾았던 마을 주민들이 어머님의 홍어무침과 상차림을 그리워했고 어려운 시절에 넉넉하게 살림을 나누어 주셨던 덕담이며 5남매를 키우네 시는데 한 번도 험한 말 한번 하지 않았다는 자식들의 증언과 그리움이 나의 시어머니였다. 실제 남편을 보면 공부는 혼자서 열심히 했다지만 지혜롭고 상대를 따뜻하게 배려하고 이해하며 친절하게 말하며 재치 있게 상황을 넘기는 인성은 어머니가 물려주신 것이 분명하다.
주인공 아리도 아버지를 똑 닮았고 아버지가 물려준 인성을 그대로 가져갔다. 물론 평생을 빨치산 부모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으니 조금 비뚤어진 구석은 당연하고 정상이다. 아리의 아버지는 빨치산의 딸이란 굴레를 평생 안겨준것이 미안하다고 움츠려 있지 않고 삶에서 당신의 신념과 이념을 사람을 대할 때의 몸으로 보여준
아버지였다. 그 시대에 민족해방에 대한 분쟁 이념을 가진 빨치산은 '지렁이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민주주의 나라는 그런 아버지를 배척했고 감시했다. 선한행위와 의로움만으로 존재를 강조하거니 바꿀 수 있는 시대적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굳은 이념에 대한 믿음과 사람의 도리를 선택했고 당신의 담대하면서 뻔뻔한 믿음과 신념은 딸에게 경험과 지식으로 전달되었다. 그러 때마다 아리는 피하고 싶었을 테고 강하게 부정하고 싶어 더 무심한 척 아버지를 관망하며 선을 긋고 거리를 두었던 걸로 보인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알게되는 아버지와 사람들 사이에 경험과 추억을 통해서 아리는 아버지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현실적인 위안을 얻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똑 닮은 딸이 스스로를 미워했던 만큼 미워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기억 속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이 책의 전체 스토리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감옥에 가기 전 함께해 주었던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는 딸은 죽을 때까지 떨어졌던 시간만큼 가까워지지 못한 부녀간의 사이를 사무치게 아파하고 운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그리워했음을 알기에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후 3일간의 장례기간동안 아리의 아버지는 다시 부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아버지와 주변 인물, 그리고 딸 아리와의 모든 관계는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스르르 녹아 스며들어서 관계가 회복되고 이제까지의 갈등이 아무렇지 않았던 삶이되고 그 중심에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있다.
삶에 위기가 닥쳐오면 우린 플랜 a,b,c 그 이상의 플랜을 세워 놓고도 때론 주저 않거나 포기하는데 아리의 아버지는 오로지 플랜 A만을 갖고 살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나 위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는 분이었다. 빨치산이어서도 아니고 훌륭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노력한 아버지였다.
소설은 한치의 흐트러짐이나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크게 사건을 확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이사이 그들만의 진정어린 대화와 유머스러운 상황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 가 우리에게 싫지 않은 유쾌함으로 다가오고 극적인 환경에서 잔뜩 들뜨고 격양될 수 있는 분위기를 짧고 서정적인 문장들이 만져 눌러주는데 이건 오롯이 작가의 몫이어서 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데올로기가 나오고 민족해방이 나오고 민중이 나오는 큰 주제들 속에서 가장 작아 보일수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억지스러운 감동이 아닌 진정한 큰 감동으로 전해 준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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