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에 관련한 많은 글이 있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김훈의 하얼빈이 압도적으로 인상적인 건 바로 이야기이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라는 김훈의 열정은 가슴에 심어 놓은 이야기의 씨앗으로 오랜 시간 갖고 있었기에 안중근의 길었을 시간들을 절제되고 압도적으로 압축해서 그려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김훈은 글을 망칠래야 망칠 수가 없다. 지나친 창의성은 오히려 평이해질 수 있는데 김훈의 특유의 단문은 안중근의 짧은 나날을 긴박하고 심도 있게 표현하기에 적당했다. 이토가 통감을 그만두고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1909년 10월 19일 블라디보스크를 거쳐서 하얼빈에 10월 22일 도착,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는 안중근에게 총상을 입고 그 자리서 사망하게 된다. 작가는 이 짧은 며칠을 위해 안중근이 느끼고 번뇌했을 순간들을 쓰기에 엄두가 나지 않아 수십 년을 고뇌했다고 하지만 김훈 작가의 표현력만이 긴 시간을 압축한 '하얼빈'을 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읽으면서 다시 하게 된다.
그만이 가진 문체적 특징은 압축된 시간을 독자가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우리는 공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일대기가 처음부터 끝을 기록하는데 반해 김훈의 '하얼빈은'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순간과 그 전후의 짧은 나날에 초첨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하얼빈'에서는 초반부터 압축된 복선들로 보이는 간략하고 의미 있는 문장들이 보인다.
메이지는 또 말했다. "공부할 때 시계를책상 앞에 놓아라, 짐이 내리는 시간이다" p13
메이지는 청일, 러일 전쟁에서 승리했었고 40년동안 황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위세는 대단했을 테고 메이지가 시간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위엄을 가진듯한 말만으로도 이 당시 시대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노루의 몸통을 헤집고 나온 탄두가 눈 위에 떨어져 있었다. .......총이란, 선명하구나. p23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과 함께 울고 번뇌하는 칼이 있다면 '하얼빈'에는 총이 있다. 이미 저 문장으로 안중근이 이토의 가슴에 쏘았을 총의 힘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고 많은 감정과 몰입감으로 안중근을 떠올리게 된다.
우덕순은 기묘생 토끼띠로 안중근과 동갑이었다. p102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고뇌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던 안중근은 하숙집에서 이토가 대한제국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일제의 세력을 과시하게 위해 연출한 때 지난 신문기사와 사진을 보고 이토를 저격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우연히 거사를 결심한 듯 보이지만 운명이었을 것이다. 의병 활동을 함께 했던 우덕순을 찾아간다. 다시 만난 우덕순과 안중근은 기묘생 토끼띠 동갑이라고 했다. 옛 어른들이 무심히 하시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본디 토끼띠들이 병약하고 순하다고 했다. 일본치하에서 힘없고 시름하고 있는 조선 백성들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두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안중근의 대의를 알고 말없이도 운명적으로 함께하는 우덕순의 모습도 나라를 되찾고 억압과 수탈 속에서 해방을 갈망하는 조선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대표한 것일 거란 생각도 했다.
'조선 반도의 철도로 압록강을 건너서 하얼빈으로 이어진다. 이토는 철도를 좋아한다는데, 하얼빈역 철길은 총 맞기 좋은 자리다. 나도 철도를 좋아한다. 쏘기도 좋은 자리다. ' 어둠 속에서 둘이 마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은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P117
철길은 쭉 뻗어가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토는 일본, 대한제국, 중국, 러시아를 거쳐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철도를 깔아 쭉 뻗어 나가고 싶은 욕망을 가진 자였을 테지만 그 철길을 총 맞기 좋은 자리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나는 소름이 돋으며 작가의 절제되었지만 흥분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얼빈을 그토록 강조했던 작가가 철길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를 가장 작가답게 힘 기울여 짧고 굵게 표현하였다는 생각이다. 또한 쭉 뻗은 철길은 앞으로 조선이 가져야 할 굳은 의지의 표현이 될 수 있도록 작가는 안중근을 통해 일본의 전세를 역전시킨 장소임을 강조하며 하얼빈을 두각 시킨 게 아닐까 한다.
마나베는 자신의 질문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덕순은 마음속의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에 답했고,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을 부수었다...... 안중근의 진술과 우덕순의 진술은 행위의 미세한 대목까지 일치했다. P232
가장 힘 기울여 표현했을 안중근의 거사와 재판 과정, 그리고 조사하며 남긴 신문조서와 공판 기록들은 사실성을 높여 안중근의 내재적 갈등과 인간적인 면모 그리고 대의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고초를 겪었을 테고 조사로 길었을 시간들은 단문 안에 깊고 슬프고 정의롭게 표현되었다. 순수했던 의지와 의도와 결의가 읽는 내내 느껴졌다. 재판부의 질문을 부수었다는 표현이 안중근 와 우덕순의 정당함을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책 말미와 후기에서도 보이는 안중근과 천주교와의 관계이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정치적, 민족적 대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얼빈의 거사를 교리상의 '죄악'으로 단정했다고 한다. 안중근의 거사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공공연히 표명했고 안중근에게 성사를 베푼 빌렘 신부를 중징계했다라고도 한다. 종교인으로서 안중근을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신선하면서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안중근이 겪었을 종교, 죄, 벌에 대한 가치를 떠올려본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살기를 가르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라고 성경은 말한다. 노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배를 만들었을 때 사람이 조정할 수 없는 키가 없는 배였지만 노아는 순종했고 믿음으로 인생을 맡겼기에 풍랑 가운데 노아의 가족들을 전적으로 완벽하게 지켜주셨다. 빌렘 신부가 안중근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바랬던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이 가졌을 갈등 또한 김훈 작가가 알리고 싶었을 안중근의 청춘이었겠구나 싶었다.

서술 장면 하나하나가 명장면이고 명대사가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시대 배경을 생각하며 읽으면 안중근의 말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되는 책이 분명했고 그의 의지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꼬마수다 책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정은 연작소설 연년세세 年年歲歲 (0) | 2022.09.09 |
---|---|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장편소설 (3) | 2022.09.05 |
김애란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인생 (4) | 2022.08.19 |
팀 보울러 리버보이 (0) | 2022.08.07 |
손원평 장편소설 튜브 (0) | 2022.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