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이고 주관적 취향을 찾는 요즘 시대에 본질적인 진실과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가 마치 벌거벗은 채로 대면하고 직시한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럼에도 인물들의 속을 투명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가장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임에 틀림없고 읽고 나면 자리서 쉽게 일어서기 어려운 신선하고 오묘한 이야기입니다.
봄밤이란 제목은 해석에 따라 다중적인 뜻을 내포할 수 있겠습니다.
따뜻한 계절이 시작되는 봄의 밤이란 뜻도 되고 아지랑이가 피어나던 낮의 열기가 식어 차분해지는 밤에 여전히 꿈틀되는 생명령이 느껴지는 시간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글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 영경이 소리 내어 울며 흥얼거리던 김수영 작가의 [봄밤]도 동의어인데요 사그라들어가는 수환과 영경의 삶의 희미한 불꽃을 살려내는 생명과 같은 간절한 기도문 같은 것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수환과 영경은 각자의 상처로 삶의 의욕을 잃고 실패한 비관적인 상황에서 각자의 친구가 재혼하는 결혼식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어진 술자리에서 취한 영경을 수환이 업어서 데려다 준게 인연이 되고 술을 먹지 않는 수환과 술만 먹으면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영경이 잦은 술자리를 가지고 데려다주는 일이 반복되며 일주일 만에 수환이 옥탑방을 정리하고 영경의 아파트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12년 동안 떨어지는 일이 없이 살게 되지만 둘 다 건강을 잃고 있는 상태에서 만났기에 슬픈 결말로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됩니다. 부인과의 위장이혼과 부도를 맞게 되고 40대 젊은 나이에 류머티즘 관절염이 진행되어 악화되는 수환과 전 남편과 사이에 아들 양육권을 갖고 함께하던 영경은 아이를 몰래 데리고 해외로 이주한 시댁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각자의 상처가 깊었고 살아갈 이유를 잡아야만 했던 두 남녀는 병이 깊어져서 서로 떨어져야만 하는 상황에서 같은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이후 병원에서의 두 인물의 서로에 대한 사랑의 모양은 슬퍼서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야기는 짧고 강렬합니다. 인물들의 대사와 묘사도 탁월한데요
요양원 직원들은 유난히 의가 좋고 사랑스러운 대신 화약처럼 아슬아슬한 그들 부부를 '알류 커플'이라 불렀다
기꺼운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나마 자신의 분자를 조금이라도 늘리는 일이라고, 영경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이라도 크게 만드는 일이라고 수환은 생각했다
알코올 중독증이 심해지면서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디기 어려워 외출을 나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영경, 그런 영경을 제지하지 않고 그녀의 의사를 존종해주는 수환은 영경의 외출을 허락하는 것이 영경에 대한 그의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로를 생각하는 수환과 영경의 감정이 영화처럼 눈에 보이는 화면은 아니지만 대화와 글의 묘사에서 그들의 비애, 슬픔, 사랑, 그리움, 연민 등등 다양한 감정이 새기어져 딱히 한두가지로 정의 내리기 어려워집니다.
또한 수환과 영경은 너무도 가까운 사이로 하나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난과 아픔을 함께하는 의지가 보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각자가 해결해야 하는 전쟁 같은 숨 막히는 사랑을 합니다. 이 숨 막히는 긴장감이 어떻게 어디까지 갈지 가슴이 답답해지는데요 간병인 종우가 영경에게 애타게 전화를 하며 죽어가는 수환에게 자신의 연애사를 중얼거리는데 읽고 있다 보면 급박한 상황에 완벽하게 흡수되어 숨 쉴 구멍을 찾으며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종우는 동호회에서 만난 은경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소연을 잠시 만나 이용하고 은경과 연결된 이후 소연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떠나갔는데 그런 소연의 비극과 홀로 남을 영경에게서 동일한 비극의 잔영을 발견하고 죽어가는 수환에게 이야기하며 종우는 영경을 애타게 찾는 전화를 합니다. 비극적인 결말과 주인공의 슬픔을 예견하는 대사들이 이제야 끝나는구나 하는 망연자실함과 무너지는 슬픔으로 차분해지기까지 합니다.
가끔 영경의 눈앞엔 조숙한 소년 같기도 하고 쫒기는 짐승 같기도 한, 놀란 듯하면서도 긴장된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오르곤 했는데 , 그럴 때면 종우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 왜 그러냐고 거듭 묻는데도 영경은 오랜 시간 울기만 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마냥 한 방향을 보고 달려온 수환과 영경의 아픔이 종우가 만들어주는 숨구멍을 통해 준비된 아픔으로 내 안의 아래까지 쳐다보며 더욱 슬프게 마무리합니다.
두 주인공에게 마지막 따뜻한 인사를 해주고 싶어집니다. 육이 죽어가던 순간의 수환과 영이 죽어가던 영경이 마지막 순간까지 각자 짊어진 전쟁 같은 기억들을 보듬으며 상대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그리워했을 모습이 또 다른 [봄밤]이란 시였겠구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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