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신선했던 소설 <시선으로부터>. 말 표현이 부족한 내가 갖고 있던 생각과 순간포착의 경험을 그대로 글로 전달해줄 수 있겠다 싶은 손에 꼽는 작가로 기억하며 다른 소설들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시공간을 한참이나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는 폭 넓은 시대상 배경과 다양한 인물 구성으로 슬금슬금 책 읽기 좋은 가장 게으르고 편안한 자세를 찾아서 하루의 반을 보내 다 읽고 후회가 없는 책입니다. 책 표지 뒷면에 박상영 소설가가 쓴 서평처럼 '내 생에 이토록 한국의 현대사를 정통으로 관통하는, 그러면서도 경쾌함과 꼿꼿함을 잃지 않는 인물을 본 적이 있었던가'라는 멘트가 머리를 치는 소설입니다. 일제 치하부터 현대까지 시선으로부터 출발되어 저마다의 사연을 이유로 정체성을 찾고 고유한 자신을 돌보고 찾아가는 시선의 후손들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게 서로 옭아매었는데 답답함 없는 후련함이 있는 멋진 소설입니다.
소설은 10년전 고인이 된 심 시선이 자신의 제사 따위는 절대 지내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장녀 명혜가 십 주기를 기념하는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자는 제안에서 시작됩니다. 하와이는 심 시선의 이야기가 실제적으로 시작된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타국 하와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내는 죽은 이를 추모하는 제사라는 소재가 낯설 수 있지만 신선한 제사를 준비하는 시선의 3대에 이르는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가 낯설음을 흥미로 바꿔줍니다.
심 시선은 남북이 대립하던 시절 남쪽의 군인과 경찰들에게 가족들이 학살당하면서 살기 위한 방법으로 하와이 이민을 택합니다. 하지만 노동과 가난 속에서 한국에서의 삶과 다를 것이 없는 삷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연한 기회에 독일의 유명한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공부하기 위해 독일 뒤셀도르프로 건너갑니다. 여기서 마티아스는 시선의 첫 번째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티아스는 세심한 규칙들을 그만의 공간에서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견고한 자신의 세계가 있고 창의적이고 뛰어나지만 괴팍한 예술가였기에 노동, 인종차별, 성차별을 겪고 비인격적인 소유물로 그 옆에서 희생하면서 예술가를 빛나게 하는 여성 시선을 만들려 합니다. 하지만 인내하면서도 상대가 요구하면 자신도 요구하는 적극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였던 시선을 보게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존재감이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마티아스 마우어는 충분히 시선이 정체성을 확인하고 앞으로 시선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가게 하는 인물이었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후 독일-말레이시아 혼혈인 요제프 리와 결혼하지만 마티아스 마우어의 자살은 심시선과 요제프 때문이라는 온 유럽의 지탄에서 벗어나야 했고 한국행을 선택해서 귀국하는 시선입니다. 하지만 죽어서도 시선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괴롭히는 인물 마티아스 마우어입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주변인의 도움으로 베일에 싸인 인물로 비추어지게 되는 시선입니다.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배다른 남매 4명을 키우기 위해 붓대신 펜을 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 속에 녹여내지만 한 번에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글에서 한국의 문화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지 않는 시선의 고유한 정체성을 두 번째로 확인하게 됩니다. 남매 4명과 손녀 5명을 한국의 문화에서 키우고 자라나게 하면서 한국의 시대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색을 가진 인물들로 키워내는 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처음 시작처럼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내용부터 일반 한국 문화와는 어긋납니다. 집안이 여성 중심이고 여성의 권위를 세우고 집안의 리더로 자리매김하는 모습들도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심시선 집안의 남성의 역할과 비중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억지스럽지 않은 페미니즘을 잘 살린 작가의 의도가 보이기도 합니다.
심 시선의 정체성이 가족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음을 확인합니다. 챕터 사이사이 시선의 글들이 먼저 인터뷰처럼 보입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보다 돋보이는 감성과 사실적인 디테일을 갖고 세상을 살아온 시선의 모습이 보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가족 구성원의 시선이 중요한 작품의 테마입니다. 결혼, 연예, 가족의 모습은 권태롭고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전쟁, 가부장적 사회제도, 페미니즘, 남성 우월주의, 편견, 사회약자, 출산, 경력단절, 왜곡, 환경오염 등의 무거운 주제를 주관적인 시각의 시점에서 절묘하게 섞어 기분 나쁘고 힘들었을 인물들의 감정 순화를 아주 잘 써준 작품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주인공입니다. 한사람 한 사람 시선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이고 제사를 계기로 그들이 내재하고 있는 정체성이 단단해집니다. 현실적이고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개성들은 비현실적일 만큼 조화로운 가족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시선이 쓴 글들처럼 시선의 가족들은 어렵지만 부딪히어 자신을 찾아가고 독립적이었던 시선을 그대로 닮아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지게한 요소가 익숙해지면 일상화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시선은 그 순간을 잘 이겨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이 잃어지는 순간, 곧 삶이 타인의 것이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면 시선은 그 의미를 잘 알고 느슨해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인물입니다. 그 노력이 자신을 빛나게 하고 자손들을 일깨웠습니다.
사랑은 돌맹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시공간을 넘어서 시선이 남긴 조각들을 떠올리고 감쌀 수 있는 시선의 가족이 따뜻했습니다. 뻔한 이야기가 뻔하지 않을 수 있었던 <시선으로부터>의 방향성은 오랫동안 내 존재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는 지표가 될 소설입니다.
'kbs우리시대의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상영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0) | 2022.01.04 |
---|---|
백민석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0) | 2022.01.02 |
조해진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0) | 2021.12.12 |
이승우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 (0) | 2021.11.30 |
오탁번 소설 아버지와 치악산 (0) | 2021.11.22 |